하나의 사진을 찍는 순간, 당신의 이른바 '결정적 순간'은 계산될 수도, 예고될 수도, 
사고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좋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이란 쉽게 사자지는 것 아닌가요?
물론이죠, 
늘 사라져 버리지요. 그가 미소지었다. 
그렇다면 일 초의 몇 분의 일인 그 순간을 어떻게 압니까?
데생에 대해 말하고 싶군요. 데생은 명상의 한 형태입니다.
데생하는 동안 우리는 선과 점을 하나하나 그려 나가지만 완성된 전체 모습이 어떤 것인지는 
결코 장담할 수 없습니다. 
데생이란 언제나 전체의 모습을 향해 나아가는 미완의 여행이지요....
그렇군요, 
하지만 사진 찍는 것은 그와는 반대가 아닐까요, 
사진은, 찍는 순간, 설혹 그 사진이 어떤 부분들로 이루어지는지조차 모르는 경우에라도, 
하나의 전체로서의 순간을 느끼게 됩니다. 
제가 묻고 싶은 것은 이렇습니다. 
그 순간의 느낌은 선생 자신의 모든 감각의 최대한으로 예민하게 가동된 상태, 
다시 말해 일종의 제육의 감각 - 제삼의 눈이라고 그가 거들었다 - 으로부터 오나요,
아니면 당신이 마주하고 있는 대상으로부터 오는 메세지인가요?
그는 낄낄 웃으며 - 마치 동화 속 토끼가 웃는 것처럼 - 무언가를 찾으러 몸을 옮기더니 복사된 
종이 한 장을 들고 왔다. 
이게 내 답이요. 아인슈타인이 한 말이지요. 
거기에는 자신의 손으로 베껴 쓴 글이 적혀 있었다. 받아서 읽어 보았다.
1994년 10월, 아인슈타인이 물리학자 막스 보른의 아내에게 부친 편지에서 인용한 글이었다. 
" 살아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해 내가 느끼는 연대감이 너무도 커서, 
한 개인이 어디서 태어나고 어디서 죽는가는 내게 별로 중요치 않습니다..."
 
승객이 반 넘게 찬 지하철 안에서 나는 빈 자리 하나를 발견했다. 저쪽 끝에서 사십대 초반의 남자 하나가 
눈을 감고 있는 여자의 손을 잡고서, 장애가 있는 자신의 아내에게 도움을 달라는 연설을 하고 있었다. 
집을 비워 줘야 했고, 구호시설에 가게 되면 서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그는 말했다. 
남자는 승객들을 향해 말했다. 
장애를 사랑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당신들은 몰라요. 나는 이 여자를 거의 언제나일 정도로 사랑하고 있어요,
적어도 당신들이 아내나 남편을 사랑하는 것만큼 사랑해요. 
승객들이 돈을 준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남자는 말했다. 동정에 감사드려요. 
이런 광경이 벌어지던 어느 순간, 나는 앙리가 자신의 라이카를 들고 거기 서 있기라도 한 듯이, 
문간 쪽을 홀연히 바라보았다. 
아무 생각 없이 이루어진 즉각적인 동작이었다. 
그는 자신의 모성적 글씨로 이렇게 쓴 적이 있다. 
사진은 끝없는 응시로부터 나오는 무의식적인 영감이다. 사진은 순간과 영원을 붙든다. 
*  존 버거 < 글로 쓴 사진 > 中 NO.11 < 지하철에서 구걸하는 남자 >
 
- 존 버거,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과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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