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골목 끝 헌책방에서 금방 나온 듯한 너의 유고 시
집을 보았다. 어떻게 예까지 흘러왔을까? 세상은 아직 너
의 죽음을 눈치 채지 못한 것은 아닌지. 외로워, 외로워 
죽을 것만 같다고 말했던 너의 시간이 책갈피마다 강물

 

의 푸른 안개로 피어나고 때로는 인사동에서 마석 가는
막차를 놓치고 난 뒤의 쓸쓸함처럼 새벽안개로 흩어지는
데, 벼랑진 너의 시간은 아직도 골목 끝에서 첫사랑처럼
나를 맞고, 쓸쓸한 여인숙방 너머에서 들리는 라디오 노
랫소리처럼, 통화가 끊어진 뒤의 부재음처럼, 네 목소리 
가 단음으로 들려온다. 
 
 
  너는 햇빛 없이도 푸르렀는데, 물기 없이도 스스로 뿌
리였는데, 그 모든 푸름과 뿌리라는 게 상처였고 외로움
이었다고 말하는 너를 주문처럼 속으로 읽는다. 상처로
깊어질 수 있었던 너는 정말 강물이었나. 열 손가락이 봉
숭아보다 더 붉어 아프다*고 말했던 너의 시간이 오늘 내
게로 와 꽃핀다. 술 취한 어둔 골목 모퉁이에서 더 이상 
토해낼 것 없는 살아가야 할 날들이 퉤퉤 뱉었던 너의 
흐려진 눈빛이 그랬을까. 네 눈 속 그 길고도 깊던 동굴
이 끝없이 널 부른다고 했지, 그래서 넌 그 속으로 너를 
스스로 거두어 간 것인지. 중환자실에서의 마지막 밤과 
네 영정을 보던 그날 사이, 첫눈이 참 많이도 내렸다. 수
천 마리의 새떼들이 널 데리고 갔다는 걸 사람들은 아직
몰라. 아마도 모를 거야. 
 
* 이승희 < 그날 이후 > , 여림 시인을 기억하다 
 여림의 시 < 손가락들이 봉숭아보다 더 붉어서 아프다 > 에서 변용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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