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중퇴의 학력은 고졸이라는 출판사 사장과의
 면접에서 가벼운 실랑이를 벌인 뒤 방송국 스크립터로
 일하는 대학 동창을 만나 늦도록 술추렴을 하다 귀가한
 다음날 나는 책상 위에 커다랗게 대체로 사는 건 싫다
 라고 써붙여 두었었다. 며칠 후 퇴근길에 소주 두 병을
 사들고 들른 녀석은 대강 대강 사는 것이 싫은 것이냐
 사는 것이 대체로 싫은 것이냐며 농짓거리처럼 슬몃
 물었다 뜬금없는 그 말에 별 수 없이 객적게 웃어넘기긴
 했어도 자리가 파한 후 혼자 막잔을 비우기까지 나는 퍽
 막막했었다. 어쩌면 나는 그리 살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정규 대학을 졸업하고 웬만한 직장에 자리를 잡아 다달이
 월급에서 주택부금과 자동차 할부금을 곶감 꿰듯 부
으며
 괜찮은 여자와 결혼을 해 밤톨만한 아이들을 내리 두고
 몇 번의 이사 끝에 허름한 서민 아파트라도 장만하는
 그랬다면 대체로 사는 것이 싫다라는 생각은 소시민의
 지나가는 푸념 쯤으로 여겼을 테고 그 무슨 경구처럼
 책상 위에 저리 붙여두지도 않았으리라. 그러나 그럼
에도
 불구하고 대강 대강 사는 것이 싫은 것과 사는 것이
 대체로 싫은 것의 차이는 확연한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어느 누가 한 뉘를 통해 무엇인가를 이루려 할
 것이며 거기에다 목숨까지 바칠 것인가.
 누구에게랄 것도 없을 혼잣말을 불콰해진 얼굴로 나는
 비루 먹은 말처럼 느릿느릿 앉은뱅이책상으로 기어가
 구겨진 파지를 호기 있게 쓸어버리며 기어이 끝장을
 보고야 말겠다는 듯이 중고 타자기의 전원을 올린다.


'여림시인' 카테고리의 다른 글

* < 허망한 뿌리는 숨죽이고 >  (0) 2022.01.15
* < 지하철 묘지 >  (0) 2022.01.15
* < 땅 속의 방 >  (0) 2022.01.14
* < 떠난 집 >  (0) 2022.01.14
* < 무인도에서 일일 >  (0) 2022.01.14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