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혹은 너는 나무숲에서 오래된 책 한권을 발굴했다
나무숲은 꼭 갈색일 필요는 없다 아주 희미한 갈색의 암시 정도만
먼지와 빛의 깊이를 지닌 고고학적인 아름다움이라고 해두자
누군가 경건한 얼굴로 문장을 읽어내려갔다
행간과 행간은 지독히도 넓었고 침묵 또한 꼭 그만큼 벌어졌다
정말 가슴아프게도 들리지 않습니까
무엇이 말입니까
소리내서 말할 리 없잖아
꿈에서 깻을 땐 단 하나의 단어밖에 기억나지 않았다
어머니,
흔들리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내가 기억하는 얼룩과 네가 기억하는 얼룩
흰 것 위에 검은 것, 검은 것 위에 흰 것
벌레 먹은 나뭇잎 구멍 사이로 오후 네 시의 햇빛이 스러지듯이
보도블록 깨진 틈 사이로 모래알들이 쓸려들어가듯이
누구든 좋으니 단 한 사람이라도
나를 아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
떨어져나간 겉장, 제목도 없는 책
나는 일평생 나라는 책을 읽어내려고 안간힘 썼습니다
갈색의 갈색의 갈색의 책
무슨 말이든지 하세요 그러면 좀 나아질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완전히 침묵하는 법을 배우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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