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장 속에, 책상 서랍에 술병을 숨겨두고
혼자 마시는 술은 독약이었습니다
떨리는 손으로 이력서를 쓰다 말고
내어다 본 창문 밖은 이른봄이었겠지요
허름한 옷에다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요즘은 도시 공공 근로자 일을 합니다
은빛 피라미 떼 같은 햇살이 자욱한 점심때
양은 도시락 하나씩을 찬 손에 꺼내 들고
저희들은 잔디밭에 둘러앉아 밥을 먹습니다
밥 대신 소주 한 병을 꺼내놓는 노인도 계시지요
추위에도 떨고, 술 때문에 떨면서도 누구도
제 옷깃을 바로 여미는 사람은 없습니다
산다는 일은 어쩌면 이렇게 조금씩 제몸을
떨면서도 애써 모르는 척하는 것은 아닐까요
그렇지만 걱정 마세요, 그렇게 밥만 먹고
하루를 보내지는 않으니까요
저희들은 순한 양떼가 되어 오늘 하루
공원 풀밭 구석구석 담배꽁초를 뜯고
쓰레기를 주워 먹었습니다

돌아오는 길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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