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백지 위에다 동그라미를 그리어 놓고
가운데를 실로 매듭을 지었더니 8자가
되었다. 주위를 가위로 오려낸 다음 방바닥에
드러누워 하루종일 팔자를 가지고 논다.
눕혀도 보고 세워도 보고 뒤집어도 보았지만
역시 팔자는 알 수 없었다. 아이구 모르겠다는
생각으로 내팽개쳐 버렸더니 8자는 편안하다는 듯
코를 드렁드렁 골면서 떨어져 버렸다. 좋은
팔자란 이렇게 내버려두는 것이로구나 하는
생각을 하다 나도 몰래 잠이 들었는데
꿈 속에서 8자가 나타났다. 팔자를 고치려면
개미허리 같은 매듭을 잘라 버리라고 어떤
노인이 말을 하는 것이었다. 바로 이것이로구나
하고 깨어나 가위로 가운데 허리를 싹둑 잘라
버렸더니 8자는 작은 동그라미 두 개가 되어
허공중으로 날아가 버렸다. 그러면 그렇지
팔자는 고칠 수도 만들 수도 없는 구름 같은
것이야 하며 혼자 무릎을 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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