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도 나의 나무가 있었으면
살아 있다는 사실이 까닭없이 슬퍼지는 날이 있다.
늦게까지 책을 보거나 음악을 듣다
문득 여기 이러고 앉아 있는 건
이미 내 몸을 떠난 나의 영혼이 아닐까 하는
어처구니없는 생각으로 모두가 잠든 집안을 괜히 돌
아다니며
식구들이 잠든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거나 살며시
손을 잡아볼 때도 있다.
또는 한참을 거울 속의 나와 눈싸움을 해대다가
그래도 우울함이 지워지지 않을 때는 집을 나와
어두운 골목길을 서성대기도 한다.
그러다 행여 지나는 사람이 골목 끝쪽에서 모습을
드러내면 나는 가로등 아래로 걸어가 그 사람이 되도
록 나를 잘 볼 수 있는
자리에 서서 흥얼흥얼 콧노래를 부르며 그 사람이 옆
을 지날 때
슬쩍 어깨를 부딪쳐 미안하다는 말을 해대며 그 사람
이 강도나
인신매매범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한 안심을 하며 지
나는 뒷모습을 보면서
혼자 히죽히죽 웃음을 흘릴 때도 있다.
아, 내가 살아 있었구나, 하는 안도감과 불현듯
그제서야 혼자 깨어 있다는 뜻모를 우울함에 젖어서
말이다.
모두가 잠든 밤에 홀로 깨어 있다는 것은 쉬운 일
아니다. 그것은
내 자신의 치장하지 않은 내면세계와 정면으로 마주
앉아
있기 때문이다. 아무런 단서도 붙이지 않고 아무런 치
장도 하지 않은 마음.
살아오면서 마음밭에 어떤 시를 뿌리고 어떤 열매를
맺어 왔을까.
아니면 시원한 그늘을 드리우는 나무가 되어 그들의
곤한 몸을 편히 쉬게 했을까.
모두가 잠든 사이, 홀로 깨어 있는 사람은 넓고 지순
한 영혼을 가진 사람이다.
그는 그 맑고 지순한 영혼의 물소리로 잠들어 있는 사
람들의 영혼을 깨우고
노래를 한다.
삶이 답답하고 우리가 처해 있는 현실 어두울수록 그
의 노래는 더욱 깊이를 더한다.
깊은 밤 홀로 일어나 창문을 열고 하늘의 별빛을 바라
보라.
그리고 어딘가에 끊임없이 들려오는 노랫소리에 귀
를 기울여보라.
그러면 잠들어 있던 그대의 영혼이 눈을 뜨고 그 노래
를 향해 길을 떠나리.
그 노랫소리를 따라 한참을 가다보면 우리는 그 노래
의 주인공을 만날 수 있다.
흐린 공장의 불빛 속에서나 새벽거리를 비질하는 청
소부 아저씨의 굽은 등에서나
밤새워 진실을 갈구하는 젊은이들의 굳세게 안은 어
깨에서도 그
노랫소리는 청명하게 울려 나온다.
그들과 같이 손을 맞잡고 그들과 같이 노래를 부르면
어느새 그대의
영혼은 한 줄 선명한 등 뒤로 타올라 어둠을 밝히는
빛이 되리라.
그러한 빛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의 삶은 척박하
지 않고
더 이상 어둠 속에서 헤매지만은 않으리.
아, 오늘밤 누가 또 저리도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
잠들어 있는 내 영혼의 눈동자에 고운 등불을 켜려 하
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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