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영화비평이 항상 시네마테크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믿는다. 우리들은 여전히 존 포드와 장 르누아르, 

혹은 히치콕과 오즈, 드레이어와 혹스, 로셀리나와 부뉴엘, 케네스 앵거와 브레송, 고다르와 파졸리니, 

이만희와 마쓰무라 야스조와 함께 살아야 한다. 



그 영화를 사랑한다는 건 그 영화가 다루는 방식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영화를 사랑하는 건

세상을 사랑하는 방법이다. 그리고 또 다른 영화를 사랑하는 건 세상을 사랑하는 또 다른 방법이다 



영화가 펼친 구조와 형식 안으로 들어가 대답을 들으려 할 때 그것은 심연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걸 알고 있는 사람이 앙드레 바쟁이다. 그는 영화의 이미지가 지니고 있는 질료성을 간과하지 

말라고 충고했다. 그 어떤 영화도 이미 세상으로부터 던져진 그 질료성 없이는 단 한걸음도 

더 나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영화의 이미지에는 어떤 노력에도 불구하고 쇼트 안의 

이미지로 완전하게 환원되기를 거부하고 여전히 남아 있는 현실의 잉여가 버티고 있다. 

그것을 존중해야 한다. 


* 정성일 < 세상은 언제가 영화가 될 것이다 > 中

'好 映畵' 카테고리의 다른 글

* < 바닷마을 다이어리 >  (0) 2022.09.21
* < The Mirror >  (0) 2022.09.18
* 시인과 감독  (0) 2022.09.18
* HGW XX / 7  (0) 2022.09.18
* < 걸어도 걸어도 >  (0) 2022.09.18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