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림시인

* < 하회마을에서 >

환상의 빛 2022. 2. 23. 20:50

  이곳에서 내가 보고 들은 것은 바람소리뿐입니다.
 문설주 너머로 찰랑거리는 강물조차 쓰다 만 봉함엽
서 한 장으로 바람을 타고 목젖을
 파랗게 밝히는 들고양이 울음도 바람이었습니다.
 헐겁게 쌓아 올린 기와나 초가지붕
 아래로 설핏 든 선잠이 밀주로 익어 꿈을 부르고 그 밤
 미명의 방죽을 넘어 자디잔 조약돌로 구르거나
 살얼음 강물을 맨발로 건너는 바람의 얼굴이 굵은 모
래알로 반짝이는 것을
 나는 보았습니다.
 그리움이 아닌 길이 어디 있겠습니까
 달포 쯤
 지나면 서툰 주정에도 물이 오르고
 듬성듬성
 빠지는 머리카락 한 올마다 근심 낀 나날들이
 머리맡 풀어 헤친 옷가지로 널부러져 바람을 타는 이
곳에서
 내가 두고 떠나지 못하는 것은
 발걸음을 옮길 적마다 무릎을 채질하는 바람소리
 마지막 사람까지 혼자 돌려 보내는 바람소리뿐입니다.

* 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