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경미 < 겹 >

환상의 빛 2022. 12. 12. 12:46

1

  저녁 무렵 때론 전생의 사랑이 묽게 떠오르고

  지금의 내게 수련꽃 주소를 옮겨놓은 누군가가 자꾸

  울먹이고

 

  내가 들어갈 때 나가는 당신 뒷모습이 보이고

  여름 내내 소식 없던 당신, 창 없는 내 방에서 날마다

  기다렸다 하고

 

  2

  위 페이지만 오려내려 했는데 아래 페이지까지 함께 베이고

  나뭇잎과 뱀그물, 뱀그물과 거미줄, 거미줄과 눈동자, 혹은 구름과

  모래들, 서로 무늬를 빚지거나 기대듯

 

  지독한 배신밖에는 때로 사랑 지킬 방법이 없고

 

  3

  그러므로 당신을 버린 나와

  나를 버린 당신이 세상에서 가장 청순하고 가련하고

 

  늘 죽어 있는 세상을 흔드는 인기척에 놀라 저만치

  달아나는 백일홍의 저녁과

  아주 많이 다시 태어나도 죽은 척 내게로 와 겹치는

  당신의 무릎이 또한 그러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