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정례 < 껌뻑이다가 >

환상의 빛 2022. 9. 26. 06:02

느닷없이 너 마주친다 해도 
그게 무엇인지 알아채지 못할 것 같다 
물건을 고르고 
지갑을 열고 계산을 치르고 
잊은 게 없나 주머니 뒤적거리다 
그곳을 떠나듯 

가끔 
손댈 수 없이 
욱신거리면 진통제를 먹고 
베개에 얼굴을 박고 
잠들려고 
잠들려고 그러다가 

젖은 천장의 얼룩이 벽을 타고 번져와 
무릎 삐걱거리고 기침 쿨럭이다가 
왜 그럴까 왜 그래야 할까 
헛손질만 하다가 말듯이 

대접만한 모란이 소리 없이 피어나 
순한 짐승의 눈처럼 꽃술 몇 번 껌벅이다가 
떨어져 누운 날 
언젠가도 꼭 이날 같았다는 생각 
한다 해도 
그게 언제인지 무엇인지 모르겠고 

길모퉁이 무너지며 너 
맞닥뜨린다 해도 
쏟아뜨린 것 주워 담을 수 없어 
도저히 돌이킬 수 없어 
매일이 그렇듯이 그날도 
껌벅거리다 
주머니 뒤적거리다 그냥 자리를 떠났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