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
* 김소연 시집 < 수학자의 아침 > 시작노트
환상의 빛
2022. 9. 1. 06:31
약속을 하게 된다.
무슨 약속인지 이해하지도 못한 채로,
어느새 약속은 이루어져 있다.
그것을 약속이 지나가는 일이라고
말해두기로 한다.
너무 많이 움직이는 자와
너무 많이 말하는 자 사이에 끼어서
약속들의 간격을 헤아리는 조용한 사람,
약속을 지키는 일보다
지켜지자마자 그 약속을 지나가는 일을
하는 묵묵한 사람,
그 사람이 시인이었다.
그런 사람이 서 있던 장소에는 아무것도 없지만
어느 계절에서건 도끼날처럼 좋은 햇볕이 꽂혀 있었다.
너무 늦게 알았지만
비로소 알게 된 일들이 새로이 발생되는 것,
그것만이 지금 내게는 유일무이한
시의 목적이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