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
* 이병률 < 여진(餘震) >
환상의 빛
2022. 8. 20. 07:52
다 살고 치우고 나서야 알게 된다
찬장 뒤쪽으로 훤히 나 있는 뒷문을.
그 문 뒤로는 한여름에도 눈이 펄펄 날린다는 비
밀을
한참을 열어 놓고서야 알게 된다
처음의 처음까지 다 이해할 수 있음을
여진이 끝나고 나서야 알게 된다
그러고도 가끔은 자고 있는 중에 문이 열린다
열이 문이 열린다
봄날은 갈 것이다.
그 사실을 보내는 동안 여름날도 갈 것이다
양손으로 상자를 받았는데 상자를 내려놓지 못하고
상자를 열게 되더라도
무엇이 뼈고 무엇이 옷이며 지도인지를 알지 못하고
우리가 죽은 다음에야 다 볼 수 있으리
뒤늦게 더듬어서라도 다 볼 수 있다면
아무것 없이도 아름다우리라고
대륙의 끝으로 자신을 끌고 가
한없이 데리고 울다 지친 이
그가 들썩일 때마다 뒷문이 울린다
조금은 알게 될 것이라고
그가 끄덕일 때마다 뒷문이 따라 열린다
비릿한 뒷일들도 문지방을 넘게 될 것이라고
갈라진 마음 끝에 빛이 들듯
그렇게 가을날도 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