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림시인

* < 네가 떠나고 >

환상의 빛 2022. 4. 20. 10:55

 네가 떠나고, 네가 없어지고, 네가 사라지고
 난 뒤부터
 나는 내 몸 밖에 있는 세상을 죽여버렸다.
 죽음이 그리고 살해가 두렵지는 않았다. 죽지 않기 위해
 죽이기 위해 버둥거리고 뒤치락거렸던 감촉이 남아
있는 내 몸이 무서웠다.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이 세상에 없었고
 귀로 들을 수 있는 것이 세상에 없었다.
 그러나 늘 보고 있었고 늘 듣고 있었다. 그것은
 지금껏 한번도 녹지 않았던 깊은 계곡의 흰 눈처럼
 나의 가장 깊은 함정과도 같은 숨겨진 곳에서
 어떤 다른 사람에게도 들키지 않고 나에게만 왔다.


 끝을 알 수 없는 꼬불꼬불한 골목의 미로에서
 나지막하게 끊어질 듯 끊어질 듯 들리는 노는 아이들
소리처럼
 내 귀는 물 속 같은 나의 몸을 지나 바닥에서
 소리를 찾는다, 소리를 기록한다.


 미치광이의 시선이 날아가는 곳
 이미 이 세상엔 없듯이, 자기의 속만 들여다보는,
 오로지 번들거리고 미끈거리는 자신의 내장만을
 들여다보는, 그의 눈처럼 내 눈은
 나의 내장들의 꿈틀거림을 골똘하게 쳐다보았다.


 네가 떠나고, 네가 없어지고, 네가 흔적도 없이 사라
지고
 난 뒤부터 나는 안다.
 나는 내 몸 밖에서는 다시는 너를 찾지도 않았고
 기다리지도 않았다.


 내 눈이나 내 귀 내 손가락이나 내 발가락들이
 너를 거머쥘 수 있으리라 믿지 않았다.
 다만 지금까지 한번도 없었던 것, 알 수 없는 것이
 내 몸의 어떤 부분에서 탄생하고
 환생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안다.